소유냐 존재냐

  • ‘가지는 것’이 인간실존의 지극히 당연한 범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상의 많은 언어들이 “가지다”에 해당되는 말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데 헤브루어로 “나는 가지고 있다”라는 말을 표현하려면, “jesh Li(그것은 내게 속한다)” 라는 간접형태를 써야 한다. 주목할 점은 수많은 언어들이 그 발달과정에서 “그것은 내게 속한다”는 구문에서 “나는 가지고 있다”의 구문으로 바뀐 반면, 에밀 방브니스트가 시사했듯이, 그 반대방향으로 발전한 예는 확인할 수 가 없다는 사실이다.
  • 정신분석학적인 여러 경험이 보여주듯이, 과잉보상 행위에 의한 이런 종류의 거부현상은 매우 흔히 일어나는 사례이다. 예를 들면 광신적 채식주의자들은 그런 식으로 파괴적 충돌을 몰아내며, 광신적 임공임신중절 반대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살인욕구를 몰아낸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생각난다)
  • 존재적 실존양식을 명시해줄 듯한 하나의 상징이 있다. … 푸른색 유리가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푸른색을 제외한 다른 색깔을 모두 흡수하고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실증적인 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유리를 보고 푸르다고 말하는 실상은 그 유리가 바로 푸른색을 품고 있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푸르다고 부르는 근거는 유리가 품고 있는 것에 있지 않고, 유리가 방출해내는 것에 있는 것이다.
  • 여기서 말하는 “종교”의 개념이 반드시 신이나 우상을 상대하는 체계, 그래서 종교로 공인받는 체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개인에게 지향할 틀과 헌신할 대상을 제공하는, 어떤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사고 및 행동 체계를 포괄하는 말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학자들의 사상이나 당시의 사회를 다루는 부분들은 와닿지 않았지만, 핵심 주제인 ‘소유’와 ‘존재’를 다루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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